Public Art Issue July 2025

 

박지나의 회화는 회화적 경험의 위기에 응전하는 하나의 전략으로 여겨도 좋을 것이다. 막힐 쏟아지는 과도한 이미지의 세계에서, 그리고 이미지란 것이 대개 디지털 미디어를 통해 생산되고 소비되는 조건에서, 회화가 이미지의 우주 자신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기란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닐 것이다. 박지나의 회화는 그런 점에서 자신을 이미지로써 민감하게 의식하는 것처럼 보인다. 회화가 외적 현실을 묘사하거나 재현하는 미디엄으로서 주도적 역할을 하던 때가 저물고 , 회화가 여러 미디엄 중의 하나로서 자신을 날카롭게 의식하는 것이 관례란 것은 딱히 정색하고 얘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회화의 매체성 접근하는 방법이 한결같을 수는 없다. 오늘날 회화가 현실에 관한 () 아니라 다른 매체와 차별적인 이미지를 내놓기에 회화로서 식별된다는 것을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회화-이미지는 사진-이미지, 영화-이미지, 픽셀-이미지 등의 등가적인 이미지 세계에서 자신의 이미지로서의 차별성을 드러냄으로써 회화에 고유한 경험을 생산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회화적 경험을 겨냥하는 좌표가 잡힐 , 우리 그림을 눈여겨보게 것이다.

 

박지나의 회화 연작 수집가의 방(The Collector's Room)’은 제목이 많은 것을 드러낸다. 먼저 그것은 외적 현실을 그려내거나 내면적 세계를 재현하는 것에는 더 이상 회화가 복무할 수 없다는 듯이, 이미 이미지화된 대상, 박지나의 그림에서라면 서구 미술사 어느 구석에 똬리를 틀고 있을 것 같은 도상들을 열거한다. 작가가 서구 회화나 조각의 고전적인 도상을 또렷이 화면 위에 제시할 때, 그것은 어떤 냉소를 머금고 있는 듯 보인다. 검색 엔진에서 이미지를 검색할 때, 어떤 이름을 입력하면 통계적으로 평균치에 해당하는 이미지가 제시되는 것처럼, 박물관을 채우고 있을 것처럼 여겨지는 이미지와 조각들도 기실 그와 다르지 않은 도상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것은 선별되고 구성되며 조직된 이미지들의 집합인 데다, 나아가 무엇보다 수집된 것들이다. 그러한 수집의 행위에 포함된 함의는 자신의 정체성 이미지를 제조하려는 노력이다. 그리고 그를 통해 자신의 문화적 위대성을 과시하려는, 작가의 어떤 그림 제목을 빌자면, ‘권력의 방(Chamber of Power)’을 축조하려는 시도이다. 그러나 이를 박물관의 큐레이션에 빗대지 않고 애호가의 개인적 소장품의 공간을 가리키는 분더캄머(Wunderkammer)’의 수집벽에 빗댄데엔, 그만한 까닭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그러한 이미지에게 미적 진리의 지위를 베풀기보다는 결국 특정한 문화적 주체의 취향과 선호를 담은 객체들로 판단해야 한다는 의지가 담겨 있을 것이다. 즉 그것은 자신들이 애호한 자신들의 이미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분더캄머는 수집된 대상보다 수집하는 자의 주관적 취향을 알려주는 이미지들의 보관소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박지나의 회화가 수집하고 열거하며 조성하는 도상적 객체의 집합은 수집의 행위를 도드라지게 드러낸다. 그리고 작가는 자신이 선호하는 자기 이미지들의 수집 목록을 공간화하는 분더캄머로 그 이미지 들을 모아 놓은 공간을 호명하면서, 그 이미지들을 강등한다. 그런데 수집 가의 방이라는 제목은 또 다른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이제 회화를 생산하는 것이 그러한 이미지를 수집하고 복제하는 일과 다름 아니겠느냐는 듯이 말을 건넨다. 그런데 이는 회화 자체에 관한 태도라기보다는 회화를 위협하는 동시대의 이미지 생산과 소비의 경험을 환유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어쩔 수 없이 박지나의 화면 속에 등장하는 도상들은 마치 게임이나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이들이 찾는 이미지 스톡(stock) 속의 객체들처럼 보인다. 물론 이러한 이미지들 역시 목록화되어 있고 제작자는 그런 이미지들 을 선별하고 수집하여 자신의 화면에 배치한다. 그리고 이는 오늘날 이미지가 더 이상 외적 현실에 관한 반영이나 모사가 아닌 이미지 간의 교배를 통해 만들어지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런 점에서 박지나의 회화는 회화적 경험이 처한 궁지를 떳떳이 직면 하면서, 회화가 이미지의 이미지를 다루는 일임을 부끄럼 없이 수긍한다. 그 탓에 박지나의 회화는 평면적인 이미지로 채워져 있다. 3차원적인 환영을 구축하는 2차원적 회화라는 상식적 어법을 거스르는 평면성의 과시는 적어도 모더니즘 회화의 가장 중요한 특성이었을 것이다. 그런 회화적 전통에 박지나 역시 충직하게 가담하지만, 자신만의 어법을 가미한다. 아마 그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것은 색채의 조성일 것이다. 박지나의 회화는 마치 태피스트리를 연상시킨다. 그것의 평면성은 마치 바닥에 놓거나 어떤 직물 의 표면에 프린트해도 무방할 것 같은, 잘 만들어진 일러스트레이션처럼 보이길 주저하지 않는다. 그런 인상을 강화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어떤 과도한 자극도 피하려 작정했다는 듯이 파스텔 색조의 색채를 세심하게 선택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안온하고 평탄한 색조는, 회화란 사진적 사실주의와 달리 주관적 정동을 드러내므로 유효하다는 주장을 강변하기 위해 강렬한 색채와 화면의 질감을 동원하는 데 급급한 회화와 거리를 둔다.

그러므로 박지나의 작업에서 나타나는 회화적 경험을 향한 몰두는 무엇 보다 이미지의 역사성에 관한 민감한 태도에서 비롯될 것이다. 회화라는 미디엄을 고수하는 작가에게 가장 큰 문제는 회화의 자율성을 드러내는 능력 일 것이다. 그렇지만 박지나는 그런 회화의 자율성이라는 목표를 지키려 각별히 애쓰지 않는다. 작가에게 더욱 중요한 것은 회화의 자율성이라는 신화적 환상이 아니라 이미지의 역사적 현황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대담하게 자신의 탈식민적(postcolonial)인 태도를 드러낸다. 그것은 회화 자체에 관한 주장을 향해 헛된 발언을 늘어놓는 것을 피한다. 작가의 입장은 서구 미술사가 자신의 고전주의적 이미지를 생산하기 위해 동원한 전략을 폭로하고 비판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박지나의 작업은 서구의 미술사가 자신의 위대함을 역설하기 위해 어떤 이미지의 목록을 만들어 냈는가에 관한 추적이자, 폭로이다. 그러나 그 방법은 우리가 이미지를 소비하는 방식을 스스럼없이 참조하는 것이다. 즉 작가의 조사 방법은 서구적 이미지의 만신전이 자랑하 는 자신의 주도적 표상을 섬네일(thumbnail)’로 환원하는 것이다.

그런 탓에 위대한 이미지의 광휘는 조잡한 키치의 수준으로 추락한다. 결국 작가의 접근 방법은 아이러니로 가득하다. 작가는 에그 템페라라는 중세 시대 이래 회화의 영원성을 기약하는 듯이 보이는 안료를 사용한다. 그것은 역사적 시간성을 초월한 보편적 진리를 보증하는 듯이 보이게 만드는 매체적 수단이다. 그러나 작가는 그러한 물감을 통해 찰나도 버티지 못 하는 디지털 이미지를 환기한다. 말하자면 에그 템페라의 중후한 안료로 채색된 JPEG GIF, PNG 같은 확장자명의 이미지를 생산하는 것이다. 그러한 역설이 자아내는 기이한 쾌감을 외면한 채 박지나의 회화를 보기란 어려울 것이다. 작가의 화면 속으로 박제될 후속 이미지들이 궁금해지는 것 도 그 때문일 것이다.  

 

서동진(계원예술대학교 융합예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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