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문희채
Collector’s Room: Cabinets of Wonder박지나가 화면 위에 콜렉터스 룸을 구축하는 법
근대 초 유럽에서 인기를 끌었던 ‘호기심의 방(Cabinets of Curiosities)’은 미술관의 초기 형태로 진귀한 외부 세상의 문물을 모아놨다.콜렉터의 취향과 학식,외부 세계에 대한 이해의 총아로손에 넣고 싶은 경이로운 외부 세상이자,드러내 보여주고 싶은 욕망의 집합체였다.박지나의 <콜렉터스룸>은 작가로서개인이 그려내고 소유하고 픈 세상이자, 전시라는 드러냄의 과정을 은유하며 회화라는 매체의 본질에 접근하고 있다.
회화적 재현과 놀이충동
작가의 콜렉션은 독일 생활에서의 낯선 일상이 가져다 준 외로움과 혼란에서 시작한다.처음에는 갖고 싶은 것들을 화폭에 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인터넷을 서핑하며 이미지들을 골라내고,이것을 오랜 시간에 걸쳐 화면 위에 재현한다. 사물을 재현해 콜렉터스 룸을 화면으로 가져온 셈이다.
화면에 대상을 그리는 회화적 재현은 대상을 단순히 복제해 시각적 환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다.곰브리치에 따르면 회화적 재현의 과정에는 작가의 마음에 어떤 심적인 경향 내지 자세가 먼저 생긴다. 이런 구상을 통해 그림을 그리는 건 대상에 대한 미메시스 본능이며, 작가는 이 본능을 따르려는 재현욕구가 있다고 한다.박지나는 회화적 재현을 통해 화가로서 자신의 본능적 놀이충동을 따른다.
느린 그리기를 통한 온전한 소유의 과정
현대 안료는 점차 빠르게 마르고 쉽게 두터운 재질감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발달해 왔다. 빠른 속도감으로 그려내 과정 자체보다는 그리는 대상에 집중할 수 있다. 박지나는 반대의 길을 간다. 원래 한국화를 전공한 작가는 그 중에서도 전통 채색화를 그렸다. 광물 가루인 안료를 개서 직접 색감을 만들어 내고, 이것을 켜켜이 화폭 위에 쌓아올리는 과정은 대상 자체에 대한 표현 욕망으로 빠르게 화폭위에 그려내는 요즘 회화들과는 결이 다르다. 독일에서 작업을 시작하며 한국 채색화 재료를 구하기 어려워지자 작가가 선택한 건 에그 템페라였다.이 또한 고전적이고 고된 작업 방식으로 하나하나 그려 넣는 건 시간도 많이 걸린다. 얇게 안료를 쌓아올린다는 점에서 동양채색화와 닮았다. 느리지만 견고한작업을 통해 얇고 투명하게 그림 속 대상을 재현하며 그리는 과정 자체에 탐닉할 수 있다. 이 과정을 통해 재현의 욕구를 충족하며 그 대상을 완전하게 소유하게 된다.
원근법의 뒤틀림 -서양 원근법에 대한 도전과 동양적 공간 구현의 재해석
<콜렉터스 룸>의 그림 속에는 사물들이 가득 차 있는 아래에미묘한 공간들이 깔려 있다. 아주 간단한 공간 구성으로 기본적 원근법이 드러난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미묘하게 뒤틀어진 공간이다. 서툴게 선을 그은 것처럼 공간은 기하학적으로 완벽하게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 하나의 소실점을 기준으로 2차원 화면 위에 3차원 공간의 환영을 그려내고자 했던 서양 원근법의 욕망에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고전적인 동양 원근법을 살펴보자. 시대마다 이름과 해석을 다르게 했지만, 한 화면 안에 가까운 곳과먼 곳이 뒤섞여 있다는 특징이 있다. 하나의소실점을 향하는특정 시점을 포착하려는 것이 아니라, 여러 시점이 함께한다. 이 과정에는 당연히 시간적인 거리두기가 생겨난다. 가까운 곳과 먼 곳을 동시에 그리면, 화면 안에서 시점이 이동하며 3차원의 환영에 더해 4차원의 시간 개념이 더해지는 것이다. 박지나의 작업은 언뜻 보기에 서양적 원근법을 구현한 것처럼 보이지만, 갑자기 회화적 평면성을 강조하는 공간 표현이 등장하거나, 미묘하게 어긋난 선들로 3차원적 환영이 깨지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오랜 시간 동양화 연구를 했던 작가의 공간 인식 표현이다. 이런 방식은 우리 ‘책가도’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근대 유럽의 ‘경이의 방’을 동양에서재구성한 책가도와 문방도에는 새로운 공간표현이 등장한다. 단순히 익숙하지 않은 서양 원근법을 재현하는 데 실패했다기 보다는, 동양화의 공간 구현 방식을 따른 대상의 3차원적 표현이자, 시점 이동을 통한 시간성의 구현이었다. 박지나의 콜렉터스 룸은 이 점에서 우리 책거리 전통과 맥이 닿는다. 독일에서 동양적 전통을 따라 그려낸 내밀한 개인적 소유와 시간의 이야기. 이게 박지나의 콜렉터스룸이다.